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레비나스

오늘의 슬픔을 만나다.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트릴 수는 없을까...

윤동주비트겐나스글나라 2011. 5. 19. 20:21

5월 19일.......6시...

따스한 봄 바람이 불어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이처럼 아름다운 날이 있겠느냐 마는 

이처럼 슬픈 날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철학을 전공하면서 세상살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면 생활세계에서의 억압과 횡포가 낳은 결과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관심이 어쩌면 앞으로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때가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생각도 할 겸....학교 후문을 통해 새벼리로 왔다. 다른 때 같으면 가좌산을 넘어 왔을터인데 오늘은 그저 평지가 걷고 싶었다.

석류공원을 지나는데 차량 두 대가 서 있다. 하나는 경기37- 0000, 또 한 대는 봉고차로 차량 번호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내가 차량을 유심히 본 이유는 사람 다니는 길에 주차를 했기 때문에 내 보행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고를 해? 말어? 이러고 짜증을 내면서 걸었다.

얼마 안 가서 나는 그 짜증이 부끄러워진 현장을 목격했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 한 분이 중절모에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서 계시는 것이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강상호선생님과 너무나도 닮은 옷매무새였기 때문이다. 흑백사진으로만 보았으나 강상호선생님도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계셨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더 놀란 것은 그 옆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휠체어를 타고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하신데다가 워낙 연세가 있으셔서 제대로 설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하신 모습이셨다. 무거운 책배낭을 내려놓고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축을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팔을 잡는데 중절모 쓰신 할아버지도, 그 옆에 계시는 젊은 부부도.....그리고 할머니도......그리고 이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와 그 엄마도......난감하긴 마찬가지인듯.......

얼추 10여 분을 씨름을 했다. 휠체어에 앉으신 할아버지가 혼자 서지 못하는데는 이유는 하반신 마비 때문이었다. 한 여름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좋은 날.....한 분은 지팡이를 짚고 한 분은 휠체어를 타고 여길 왜 오셨을까....

풀이 무성한 강상호 선생님 묘 앞에 은박지 돗자리에 제사상처럼 한 상이 차려진 모습을 보았다. 그제서야 두분의 할아버지께서 이곳을 왜 오셨는지 알게 되었다. 혹시 강상호선생님의 친척? 아니면 그의 후손들????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강상호 선생님 기일이 아닌데 어떻게 제사를 지내게 되셨는지 여쭈었다. 묘를 다시 이장해 가시는건가????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2006년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한참 국립묘지로 이장해 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었다. 그렇게 시끄러울 때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왔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사람들의 발길 끊어진가 꽤 오래 되었기에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에 대해서 참석한 사람들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가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사를 다 지낼때까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몇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힐끗힐끗 쳐다보기는 하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는 듯했다. 

풀이나 정리를 좀하지......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참 철이 없어도 한참 철이 없는 생각이었다. 얼추 20여 분 만에 제사는 끝이 났다. 강상호 선생님을 형님이라 부르면서 휠체어를 탔던 어르신이 울기 시작하자 그 옆에 지팡이를 짚고 계시던 어르신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 대략 난감.......그때까지도 나는 그 분들이 백정이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한 겨울에 돌아가신 강상호선생님 기일을 챙기지 못해 그런가....뭐 그런 생각을 했다. 울음 소리에 놀라 운동왔던 근처 아파트 아주머니들 몇 분들이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제물을 다 거두고 짐을 챙기시길래 나도 함께 거들었다. 그리고

휠체어어르신은 전남 광주에 사시는 분이고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은 수원에 살고 계신다고 했다.

한참동안 남강을 응시하시더니 진주가 너무 많이 변해서 오데가 오덴지 모르겠다시며 올때도 힘들었는데 갈때도 힘들겠다 하신다. 새벼리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하신다. 강상호 선생님과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조심스럽게 여쭸다. 휠체어 어르신은 합천이 고향이라고 하셨고 지팡이 어르신은 진주가 고향이라 하셨다. "우리집은 새비리서 올매 안 걸리는데 있었고 저 아파트 있는데는 전부 모래밭이나 논이었고 쪼매 더 가모 망경산에서 내리오는 물로 개기를 씩것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말로만 듣던 백정 후손을 만난 것이다. 

두 분 다 강상호선생님의 은혜를 죽기 전에 갚고 싶어서 왔다고 하셨다. 두 분은 형평운동 그런 건 잘 모른다고 하셨다. 다만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대접도 몬 받던 시절에 억수로 도움을 마이 받았지. 내가 백정의 자석으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태어 나 보니 내 아부지는 쇠를 잡는 백정이고 나는 그 아들인기라....그때 내가 쪼매마 일찍 철이 들었으모 어른을 그리 안 보냈을낀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휠체어 탄 저 사람은 왜정때 진주 왔다가 어른을 만나가 남원을 간다 쿠데, 어린 기 뭘 안다꼬....참 그때는 애린 마음에 가슴에 한이 많았지. 그때 내 하고 인연이 되 가 지금까지 온 기라...." 철구다리서부터 요까지 걸어오는데 사람들이 한정이 없었지...맨질맨질한 사람들을 없어도...... 우리아부지는 엄동설한에 어른 장사지낼때까지 뒷바라지를 했지....그질로 우리는 진주를 떴제.....팔도에서 사람들이 몰리가 이짝에는 발디딜 틈이 엄섰지....."

"우리가 어른한테 신세를 그때 마이 졌지....사람이라는 기 벌치가 되가꼬 백정 자석이라는 거는 안 덜키고 싶어서 고향 떠나서는 이일 저일 막 했는데 보고 배운게 도적질이라고 내가 나중에는 내 아부지가 하던 백정질을 하고 먹고 살았다." 젊은 부부들은 이제 그만 하고 가자고 재촉을 했다. 

깊은 내막은 이야기하지 않지 않았지만 왜 빨리 떠나자 하는지 그 자녀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어르신.....요새는 직업에 귀천이 없어서 백정이었음을 당당히 밝히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우리 의식 내면에는 차별이 존재하기에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안녕히...조심해서 가시라 말씀드리고 내년에는 강상호 선생님 기일때 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피곤하지만...

내가 철학을 전공하면서 놓친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인물성동론, 인물성동이론......

시작은 그것에서부터이다. 

2011년 5월 16일 오후 10시 30분에 남기다. 오늘의 짧은 경험, 긴 아픔을 기록으로 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