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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가 강상호선생님의 아드님이신 강인수선생님의 친일청산 생각을 듣다.

윤동주비트겐나스글나라 2021. 10. 16. 20:47

강인수선생님은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법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대구에 있는 국채보상운동은 법인으로 해서 직원이 6명, 기념관,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도 법인화해서 사무국장 월급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

신진균 선생님.....요새 어떻게 지내시느냐....

강인수 선생님.....친구를 기다리지 않고 친구를 찾아 다니면서 만나고 있다.

친일파에게 피해를 입은 강상호선생님의 자손인 강인수선생님이

친일청산에 대해 바라는 것은

"친일청산은 그 사람들을 처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과하라는 것이다. 그거면 되는 것이다." 

강인수 선생님은 친일을 청산하자고 말하는 것은 친일주의자를 처단하자는 것이 절대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다. 진심과 진정성있는 사과.....용서와 화해가 필요하고 갈등보다는 화합을 강조하신 강인수선생님의 마음은 만날때마다 매번 느끼게 된다. 

 

"아버지가 하신 형평운동은 기독교 사상하고는 관련이 없다. 사랑의 마음이었고

형평운동은 백정만의 해방운동이 아니고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후삼일운동이다.

양반의 횡포를 없애고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치자는 뜻으로 형평운동을 보았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3.1만세 운동으로 옥고를 치루시고

옥에서 나올 때 상해임시정부 소식듣고 희망을 가졌다. 그 소식을 듣고 그래서 형평운동을 시작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한다고 다 나가버리면 나라 안은 누가 지키겠느냐하시며 나라 안에서 안에서 형평운동, 인권운동을 해서 지키려고 했다.

 

50이 넘어서 강인수선생님을 낳았다.

어린시절 강상호아버지는

1945년 이후에 전염병(콜레라)가 유행했다.

기술도 없고 국력도 없었다. 마늘을 삶아 먹고 했는데

그 당시 아버지와 목욕탕에 자주 갔다.

검정색 비누였다.

명절날 이발소에도 갔다.

제사지낼 때 문어오리는 것을 잘하고 밤치기를 잘했다.

문어꽃...

자녀 교육때 강조하신 것은 봉곡동 집에는 대청마루에 가화만사성 붙여 두었다.

나병환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굿을 벌였다.

올때마다 술도 주고 많이 도와주었다.

겸손을 강조하셨다. 삼강오륜 중 붕우유신 강조, 신의가 있어야 한다.

겸손과 신의를 중요하게 여겼다.

강상호 국채보상운동, 3.1운동 독립운동가, 형평운동가....

도경산하에서 3.1운동을 하셨다. 

봉양초등학교 6명이 졸업했는데 3.1운동 주모자급으로 가담했다.

아버지는 애국심이 깊다.

전주이씨 자비보살 어머니가 계셔서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스승을 사숙에서 인의예지 등을 많이 배워서 몸에 밴 것 같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사람을 존중하고 도와주는 분이다.

할아버지는 학문이 뛰어났다. 할아버지는 엄하신 할아버지..

우리 양반의 갑질을 없애고 민족이 하나가 되고...독립운동이다 라고 하셨다.

새백정 나와서 소잡아라.

집에 돌도 날아왔다.

어머니도 꿇어 앉혔다.

수시로 잡혀갔다.

맨날 잡혀 갔다.

아버지는 공산주의단체에 가입한 적 없다.

누에치기를 했다.

누에실을 내고 그랬다.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친일주의자들에 의해 빨갱이로 매도당하고

이념때문에 친일주의자로 매도 당했다. 

 

녹취록의 일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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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의 시간이 강인수 선생님과 나를 이어 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수시로 전화 주시고

일이 있으면 수시로 이것 저것 말씀해 주신다.

그런 강인수선생님은 올해 84세이시다.

해마다 연로해 지신다는 것은 매번 느낀다.

강인수선생님은

"안교수님! 내 아버지는 절대 친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안교수님! 내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내가 우리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강인수선생님은 만날때 마다 그 말씀을 해 주셨었다. 

만날때마다 여쭙고 싶었던 것 하나는 매번 친일청산을 강조하신 뜻을

알고 싶다는 것......

내가 강상호선생님 연구를 시작하고 몇 가지 의문을 갖고 있던 것들이 있었는데

다른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 말씀이다.

일제 모금운동에 대한 것은 모략이었다. 

중상모략..

강인수선생님은 연극을 보시면서 아버지의 상징인 검정색 두루마기를 배우가 입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셨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떤 지점이 서운했는지......어떤 부분이 불쾌할 수 있는지.....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지점을 대신 말하는 것......

 

선생님께 참 많이도 들었던 말이

내 아버지는 새백정이라는 모욕을 동네사람들한테 무수히 당했다. 

그 수모는 말로 다 못한다......

차를 타고 오시면서도 계속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상상을 초월한다.

영상이나 녹음 같은 것 하지 않는 전제로 할때는 솔직한 심정을 말씀해 주셨다. 

형평운동가 강상호선생님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수차례 만나서 들은 이야기 중 녹취를 거부하면서 해 주신 이야기들이 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치가 떨리고 분개해서 녹취를 잃어버린 적도 있다. 

3.1동지회까지 만든 그가 친일.....빨갱이로 몰렸었던 시절..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던 시절.....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수없이 당해야 했던 배신...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반성으로 가야 했던 시절......동네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치고 부고를 써 주고......문서를 대신 읽어 주고.....문서를 대신 작성해 주어도 동네 사람들이 경찰서에 밀고를 했었고....일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강상호 선생님이 산에 가서 뽕나무를 가져 오고....누에를 기르고....살기 위해 온 집안에 ......한 밤 중에 사람들이 집안에 돌맹이를 던져도 그저 허허 웃으셨던 강상호 선생님........말년이 너무나 가난해서 쓸쓸하고 슬픈 독립운동가의 일생.........처음으로 내가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상호선생님으로 개명한 이유는 서로 평등하다는 것을 선생님 스스로 다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었다. 자신을 단도리하면서 낮은대로 낮은대로 눈을 돌리신 강상호 선생님.....

강상호 선생님은 경남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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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날마다 자퇴하겠다는 마음으로 울분을 안고 당신의 묘지로 발길을 옮겼던 20여년의 세월.........

선택은 나의 몫이라고 했을 때.......

그 선택으로 겪게 된 일들을 묘지에서 주저리주저리 술 한잔 올리면 올리는대로.....

빈 손으로 가면 빈 손으로 간대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던 나의 시간에는 근현대 이행기 지역의 역사를 만든 인물들이 있다.

그렇게 해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렇게 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그렇게 해서 인문학을 기반으로 기획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에 감사한 나의 인연들에 나는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은 바로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많아서 녹취록 중 들리는 것만 일부 기록으로 남기지만 시간 나는대로 몇 년간 녹음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서 이글을 후대 연구자들이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경상대학교축산학과가 나서서 강상호선생님의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고 기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어떻게든 말하게 하는 바탕을 만드는 것 !!!!!

그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