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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논술: 키워드"내인생의 롤모델","이산가족","나","김장하"

윤동주비트겐나스글나라 2005. 8. 19. 19:28

올해는 학생들에게 이산가족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이 어떤지 살펴 본 다음

NIE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한쪽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는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지역에도 그런 분들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자고 한 것이 김장하선생님의 사연까지 확대되었다. 

작년에 장애학생들의 입학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김장하선생님은 진주지역 취학 유예와 

관련된 조사를 하셨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었다. 학생들에게 NIE를

지도하면서 장애인 문제를 다루게 해 주신 선생님이시기에 감사한 마음이 많다.

더군다나 작년 4월에는 강연도 하시고....형평운동과 관련하여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인권은 학생들에게 학교폭력을 예방하는데 필요한 기본 키워드이기에 나는 형평운동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 주면서 학생들에게 인권의 소중함을 김장하선생님의 이야기에 걸어서

말할 때가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인권을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면 학생들은 스스로 롤모델로 삼으려고 한다. 

지난 달 말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신 김장하선생님을 잠시 뵈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잠시 뵈려고 했던 이유는

주약현대아파트 도서관에 필요한 장서 구입 도움을 받으려고 

전화를 드렸지만 전화기 너머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너무나 힘이 없으셨다.

그래서 직접 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 뵈었다. 

남북이산가족 찾기와 김장하선생님은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데

민족전쟁 당시 의용군에 입대한 진주사범 김종하가 선생님의 큰형이었고 그 형이 

남한의 부모와 형제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김장하 선생님이 사망신고까지 한 형님의 존재를 알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에 차마 입을 열 자신이 없었다.

형의 소식을 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없으신 상태였다. 

그렇잖아도 부쩍 야위어 지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냥 인사만 드리고 형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 진주교를 건넜다.

 

김장하선생님은 내가 어렸을때는 할머니께서 장대동에 있던

남성당 한약방 시절에 가끔 들리셔서 약을 지어 오기도 하셨고 

지역에서 닮고 싶은 어른으로 살아 계시기에 평소에 학생들에게도 논술 소재로 이야기를 

들려 줄 때도 있다. 그럴때마다 학생들의 꿈이 바뀌는 것을 확인한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학생들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논술 실력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추세 내지는 대세가 논술이다 보니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주제를 12개를 정해놓고 선택하게 하고 자료 조사도

학생들 스스로 하게 하는 편인데 그렇게 하려면 인물정보, 역사정보, 기본지식, 개념 정도는

제공해 주어야 한다. 때로는 학생들이 롤모델로 삼을 필요성이 있을 정도로 허약할 때도 있어서

지역에서 롤모델을 찾도록 할 때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형평운동가요 독립운동가인 강상호, 문과학생들에게는 강영호, 최계락의 작품을

들려 주면서 이런 저런 정보를 제공해 줄때도 있고 독립운동가였던 한규상이나 하동의 정재완을 말하기도

하고 역사논술은 사화의 핵심에 있었던 밀양, 진주, 함양, 거창 등의 역사인물, 조의제문, 조지서, 연산군 등을

확장하여 독서의 폭을 넓혀 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당연히 근현대사의 한 영역인 일제강점기 전후 역사도 보게 한다. 

진주라는 지역 자체가 이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다는 점은 놓칠 수 없기에 파리장서운동, 유림독립운동,

하연이야기, 나운규 이야기, 최승희 이야기까지 두루두루 정보를 주면서 추상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만든

위인전 읽기보다 현실적으로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찾아보기를 권하고 자료 제공도 한다.

그렇다보니 내가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힘들기는 하다. 하지만 나의 작은 노력이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이 된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고 작은 실마리라도 제공해 주려고 노력한다. 

아직까지는 한국최초의 건축가는 박길룡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한국 최초의 건축가는 이훈우이고

그 사람이 일신여고보를 설계했다고 말씀해 주셨던 추연백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기도 한다. 특히

추연백선생님은 역사인물 중 잘못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바루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셨었다.

논술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창의적 사고의 확장에 좋은 소재다.

그래서 추연백선생님의 증언을 토대로 건축공학도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는 에피소드처럼 이야기해 주고

대학생이 되면 박길룡과 이훈우를 연구해 보라고 조언해 줄 때도 있다.

김장하선생님의 이야기를 과거-현재까지 대략적으로 말해 준 다음 미래의 김장하선생님과

학생들이 닮고 싶은 부분을 찾게 한다. 

한 학생이 이산가족이라는 주제로 NIE를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제시한 주제가 좋아서 팀 자체에서 해 보길 권하면서 

정보를 제공했다. 형평운동을 다룰 때도, 진주정신을 주제로 NIE를 할 때도 김장하선생님은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이제는 인권하면 학생들은 먼저 자료를 찾기 위해 준비한다. 

컴퓨터 앞에 학생 네 명을 앉혀 놓고 키워드 검색법을 먼저 알려 주고

김장하-이산가족-큰형을 키워드로 제시했더니 오마이뉴스 지난 달 기사에 김장하선생님 관련 기사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출력을 해 주고 기사문을 분석하게 했다. 

이 다음에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김장하선생님이 걸어 오신 길을

비록 논술로 접했지만 한번 정도는 떠올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선생님을 닮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9991&CMPT_CD=SEARCH 

 

"사망신고까지 한 형님, 북에 살고 있다니..."

6.15공동선언실천 진주시민운동본부 고문 김장하씨, 친형 북한 생존

www.ohmynews.com

"사망신고까지 한 형님, 북에 살고 있다니.."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전화를 받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산가족 상봉이 텔레비전에서 보며 남의 일처럼 여겼는데…."진주 남성문화재단 김장하(63. 남성당한약방 대표. 사진) 이사장은 지난 21일 관계기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55년 전 6.25 때 의용군으로 가 생사를 몰랐던 친형 김종하(金鍾河. 74)씨가 북한에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오는 8.15 때 금강산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북한에 살고 있는 형이 부모와 형제를 만나고 싶다고 알려온 것이다.

경남 사천 출신은 김장하 이사장은 진주에서 교육・문화사업과 환경운동을 활발히 벌여오고 있다. 그는 진주명신고를 설립했다가 국가에 기부채납했으며,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과 경상대발전후원회장 등을 지냈고, 지금은 지리산평화연대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그는 "6.15남북공동선언실천 진주시민운동본부" 고문을 맡아 통일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지난 6.15 5주년 평양대회 때 남측 대표단으로 참가하려다가 인원이 축소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지역에서 통일운동을 벌여오고 있는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형이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까지 반가워하고 있다.

김장하 이사장의 형제는 다섯이었다. 김종하씨는 맏이로 당시 명문이던 진주사범학교 졸업을 앞두고 북한군이 진주권에 주둔하자 의용군으로 갔다. 6.25 때 사천 정동면에 있던 집이 불에 타 형님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김 이사장의 선친은 198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장남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형에게 기대가 크셨던 모양이다. 네 형제 모두 합쳐도 맏이보다 못한다는 말씀을 줄곧 하셨다. 당시 진주사범은 한 고을에서 한 두명 들어갈 정도였다. 우리는 6.25 때 형님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사망신고를 했다. 민주화가 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연좌제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었다. 공무원 시험을 쳐도 신원조회에서 다 걸렸던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힘들었던 때가 많았다."김장하 이사장은 형이 현재 북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일가를 이루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단지 남한의 부모와 형제를 찾고 있다면서 명단만 적어 보내왔기 때문이다.

"형님이 북한에 살아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의 일처럼 여겨 왔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이 메이고 한참을 울었다. 팩스로 보내는 사진을 보니까 얼굴 윤곽이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김 이사장은 살아있는 남동생과 여동생, 이미 돌아가신 두 형의 아들들과 함께 상봉자 명단을 올렸다. 그는 "요즘은 잠도 잘 오지 않는다. 형님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8.15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빨리 만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지역에서 작지만 통일운동을 벌이면서 왜 통일해야 하느냐에 대해 일반적인 생각들만 했는데, 직접 피붙이가 북한에 살고 있다고 하니까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면서 "50년 넘게 단절된 상황에서 서로 많이 변했겠지만, 너무 흔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조만간 선친 묘소를 찾아 이같은 사실을 고한 뒤, 형님이 다녔던 사천 정동국교(지금의 정동초교)와 진주사범(지금의 진주교대)을 찾아가 학적부 등을 찾아볼 예정이다.

ⓒ2005 오마이뉴스 윤성효 /윤성효 기자- ⓒ 2005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