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도시 진주를 내 손으로 기획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2014년의곡사7차중수-어떤 구조이며 어떤 소나무로 사용되었는가의 기록이 녹화됨
내게는
경남의 모든 것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큰 마음 먹고 구입한
캐논 DSLR 카메라가 있다.
모처럼
내가 아끼는 캐논 카메라로
의곡사 새로운 법당 서까래가 올라가는 모습을
담기 위해 한 가운데 장착해 놓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주지스님의 부탁으로 모든 것을
카메라로
동영상을 촬영한다는 것이
내겐 작은 떨림과 울림을 준다.
사찰의 역사를 내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
감사한 일이고
고마운 일이고
이런 기회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중간 중간에 사진으로도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 곳 저 곳을 다니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
미래의 역사를 꿈꾸어 보았다.
지금은 개천예술제도 끝나고 유등축제도 끝났다.
인문도시 사천을 기획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진주였으면 참 좋겠다.
진주라면 더 좋았을터인데....
진주라면......
곳곳에 숨겨져 있는 스토리를 찾아
인문학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온
이 지역 어르신들의 정신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진주처럼 빛나는 고고한 인문정신을
다양하게 조명할 수 있을터인데.......
영남 인재의 반이 진주에서 나왔다는 곳 진주.
나는 의곡사를 진주정신의 한 꼭지점을
찍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을 찍으면서 꿈을 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영상을 찍는 이 마음을
이 대로 "인문도시 진주"에 녹아 낼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지기를!!!!!!!!
진주사람으로 살아 온 내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양사람으로 살아온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문도시 사천이 아니라
인문도시 진주를 기획해 보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꿈꾼다.
"인문도시! 진주"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기에
가끔씩 향교도 가 보고
비봉산도 올라 가 보고....
망진산도 올라 가 본다.
진주의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아름다운 꿈을 꾸어 본다.
남강을 바라보며
또 다시 꿈을 꾼다.
인문도시 진주~~~~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기에
영상을 보며
인문학의 기본인
진주의 문학,
진주의 역사,
진주의 철학을 들여다 보며
진주의 인문정신을 켜켜이
층을 쌓듯이
한 켜
두 켜
세 켜
결을 쌓는다.
이 영상이 내겐
경남의 인문학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카이브.....
아카이브.....
나의 아카이브.....
졸업논문으로 남기기 위한 자료조사를 하면서도
경남지역의 문화아카이브를 구축해서
18개 시군 모두 인문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서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
머리에 담고
마음에 담고
가슴에 담는다.
경남의 문화사...
그 안에 담겨있는
인문사, 예술사, 생활사를
나의 시선으로...
보통사람의 시선으로...
아래에서 위로....
바라본다.
남아있는 시간 중
한 꼭지가 내게
주어진다면
인문도시 진주의 진가를 켜켜이 담아 보고 싶다.
더 큰 미래에는 경남의 문화사를
나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한 권의 책을 출판하고 싶다.
내가 본
경남의 산
경남의 강
경남의 들에 담긴 인문정신을
담고 싶다.
그런 날이 오려나.....
다음은 의곡사 중수 과정이다. 졸업논문이든
한 권의 책이든 자료로 쓰기 위해 남긴다.
신라 문무왕 5년 2월에 혜통국사(그 당시 국사로 임명되어 많은 활동을 했으나 주문,즉 말을 통해 불법을 설파한지라 원효대사처럼 문헌을 남기지 않아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여러차례 사찰 이름도 바뀌었다고 하는데 월명사(월명사라는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찾을 수 없으나 당시 월명사라는 스님의 향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달처럼 훤히 비추는 절이거나 달빛이 유난히 밝은 절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보아 신라 왕조의 안녕을 바라고 형세와 지세가 좋은 이곳에서 불심을 하나로 모아 백성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서 혜통국사가 사찰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진다. ), 또한 숭의사라 불리기도 했는데 숭고하고 의로운 절인지, 아니면 의를 숭상하는 절인라는 의미인지 사찰 중수기에는 어떤 기록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고 어떤 연유로 숭의사라 개칭하게 되었는지 그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진주지역이라는 그 지형적 특성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끼친 굵직한 항쟁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이 지역은 농민운동이나 형평운동 다양한 저항이 있었다)이 둘의 의미로 다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애장왕(806년)에 원측선사에 의해 한 차례 중수되었으며, 고려시대 명종 24년에 월명선사에 의해 또 한번 중건되었으나 승병을 기르고 훈련하면서 진주성내에 물자를 보급했던 의곡사는 2차 진주성 전투로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그 이후 병사였던 남이흥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10년에 당시 주지였선 성간선사를 도와 중건했다. 법당이 협소하여 근대시기인 고종 광무 2년인 1896년 석종 선사가 중건하였으며 이후 한 차례 더 중수하여 70여년을 버텨 오다가 사찰이 신도들의 안전을 위협할 정도로 노후화되어 2014년 윤 9월 1일인 10월24일 원담주지스님과 인연이 닿아 7차 중수를 하게 되었다.
2014년 10월 25일 아침 6시 6분에 기록을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