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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건축 대사전에 수록된 하동 칠불사 아자방지를 다녀와서-지리산이야기/지리산 자락 마을 2016. 10. 8. 15:54
저 스님아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산이 좋을진대 어찌 다시 산을 나가는가
뒷날 내 자취를 두고 보시오...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 나오지 않으리.최치원 입산시...
한 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가
사람의 감정까지 찌들게 만드는 듯 하여
스스로를 가라앉히는 훈련을 하던 즈음
이성자 미술관 도슨트 활동이 더욱 힘들어졌다.
그래서 바람을 쐬러 간 곳이 지리산이었다.
구례 지역은 화엄사를 중심으로
한 두어번 다녀온지라 그 사이에 있는
하동을 끼고 있는 지리산을 다녀로기로 하였다.
절집의 역사를 둘러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내게 많은 생각을 정리해 줌은
물론 지역문화의 아카이브가
어떻게 유지 계승되어야 하는지
다각적인 고민을 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대로 지리산은
빨치산이 마지막까지 활동했던 지역이었고
현대까지도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사는 곳이기도 하다.
칠불사는 하동에 있으며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한 곳이어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음택으로 최고의 명당이 오대산 적멸보궁이요
양택의 최고 명당은
하동 칠불사라고 할 정도이며
도선국사도 옥룡자결에서 이곳이 명당임을 밝히고 있다.
"지리산 쌍계사 입구 화개동에 조선 최대 차밭이 4-50리 뻗어 있다"는 초의선사의 말처럼 칠불사 가는 길엔 녹차밭이 많다. 쌍계사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칠불사는 쌍계사보다 고요하다. 절집이라는 것이 실감날 정도로 고요하다. 정명선사가 아자방에서 참선하였고 서산대사는 물론 초의선사가 이곳에서 참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동의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초의선사가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東茶頌)" 을 지은 곳이 이 곳 칠불사 아자방이라고 알고 있다. 무엇보다 세계 건축 대사전에 수록되어 있어서 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들러 보는 곳이기도 하다. 온돌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우리나라 참선과 불교계에서의 다도 맥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가야 김수로왕의 7명의 왕자가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와서 수도를 한 곳이 칠불사이기도 하다. 칠불사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곱 명의 부처가 된 곳이고 이 일곱명이 바로 김수로왕의 7명의 왕자를 이른다.
내가 칠불사를 찾은 이유는 7명의 부처를 만나기 위해서라기 보다 칠불사 아자방을 보기 위해서였다. 몇 개월 전 곶감집을 허물고 새롭게 짓는 과정에서 구들장이 발견되어 묘한 감정이 순간 일었고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칠불사 아자방이 떠올랐다.
잘 알다시피 아자방은 방의 모양이 亞자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구들을 얼마나 잘 놓았던지 불을 한 번 지피면 한 달동안 따뜻할 정도였다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였다. 방 구들을 한번도 뜯지 않았었다고 한다.
20대에 가끔 들렀던 칠불사의 기억은......
절집을 지키고 있는 아름드리 큰 노란 은행나무...
그리고 타는 노을 보다 더 붉은 가을 잔치로 화려한 색들이 저마다 눈을 즐겁게 한다는 것 정도....
100년에 한 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청소를 했다는 칠불사 아자방....
문화콘텐츠를 연구하는 지금 그때의 경험들이 유익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이 행사 역시 관심이 있어서 자료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나에게는 이러한 스토리들이 때로는 스토리텔링으로,..... 때로는 스토리듀잉으로......때로는 스토리플레잉으로.....많은 영감을 주는 직간접 경험요소들이 된다.
아자방....
마침 구들장을 다 들어내고 보수 공사 중이었다. 너무나 놀랐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공사장 아르바이트의 말을 들으면서 1000의 숨결이 통째로 드러난 이 곳에서 느끼는 것은 나의 불필요한 기우이길 바랄 뿐.....
문화재 전문위원의 감독도 전혀 없고....
외부인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1000년의 신비를 벗는 순간을 볼 수 없었기에 안타까움은 더 크기도 했다.
구들을 모두 덜어 내어 아자방 뒤켠에 아무렇게나 쌓아 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금도 가시지 않는다.
무엇보다 신안유물 보존과 복원 방식이 원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더욱 놀란 것은 그나마 그것도 언제 끝날 지 모른단다. 이유를 물어보니 돈대로 일을 하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복원 과정에 참여하는 기술자가 문화재 복원과 관련된 교육은 받았는지.....만약 받았다면 이렇게 비오는 날
비를 흠뻑 맞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을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문화재 관리 요원은 상주하는지....
절집에서는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비를 벗는 과정에서
또다른 아궁이가 발견되었는데
굴가마 형태라고 하였다.
양해를 구하고 구들 내부를 모두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지만
마음 한켠이 불편하였다.
-구들장 사진 공개는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