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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7월 11일 월요일 아침에 어제 의곡사에 만난 처사님과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다.
    개천예술제이야기일부비공개/생활사 2005. 7. 11. 09:56

    매주 주말이 되면 별 일 없으면 의곡사를 가는 편이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라기보다 어릴 적에 할머니 손 잡고 왔던 기억이 있는 시내 절집 중 한 곳이고 의곡사에 가면 왠지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또 어떤 때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모두 꽃이 되고 빛이 되길 바라면서 촛불 하나 켜기 위해서 오기도 한다.

    컴퓨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때로는 행복하기도 하고,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겨 10년 후, 아니 20년 후에 내 살아 온 일이 그렇게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음을 추억하고 싶기도 하고 블로그라는 것이 10년이나 20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노트에 기록하기를 좋아하던 내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일기처럼 소소하게 글을 쓴다. 가능하면 특별한 일들은 기록으로 남기는 중이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수업이 많은 날이다. 수업 준비를 미리 하는 편이지만 오전에는 한번 더 점검하는 일로 분주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어제의 안타까운 증언을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아침부터 글을 남긴다.

    처사님을 처음 뵌 것은 2002년 그러니까 5년 전 초파일이었다. 가끔씩 의곡사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시자보살님께 들었던 적이 있기는 절집에 처사님들이 열성인 경우가 많지 않은데 처사님은 꽤 열성이셨었다. 어제는 그러니까 7월 10일 일요일, 음력으로는 6월 5일이다. 20일이 유두절(음력 6월 15일)이라 열흘 후에 와 보아야 하지만 나는 평일에 시간 내는 것이 어려워서 가능하면 토요일, 일요일은 절에 가서 마음을 정리하는 편이다. 음력으로 무슨 날 무슨 날을 기억하고 부엌에 초를 켜 놓으시던 시할머님 생각이 많이 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따라 하고 싶다는 생각은 강하게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마음 한켠에는 전통이라는 것이 사라지게 하는 요인이 나에게 있음을 인지하기에 시할머님께서 당부하신 대로 뭐 안 빌어도 되니 가까운 절에 가서 남을 위해서 부처님전에 공양을 하면 좋겠다는 유지를 지키려고 한다. 

    사시마지에 모처럼 참석해서 보살님들 틈새에 끼어 잘 모르지만 노보살님들 따라 보살님들 따라 예불 드리는 것을 따라해 보았다. 그리고 공양간에서 자원봉사로 그릇을 열심히 씻었다. 그릇을 씻고 대충 정리를 마친 2시 즈음 집엘 가려고 대흥루를 나와 한글비석이 있는 곳에 가서 비석이 잘 있는지 살짝 보았다.

    그런데 처사님 한 분이 순대 한 접시, 사과 한 개, 배 한 개를 담은 접시를  비석 앞에 놓고 절을 하고 계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연유가 있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참을 돌 옆에 앉아서 지켜 보았다. 얼추 30여 분이 지났지 싶다. 처사님은 우셨다. 눈치없게 내가 그 옆에 있었으니 무안하기도 하시겠지만 팔순이 넘어 의곡사를 자주 오시는데는 무슨 연원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버스 타는 곳까지 제대로 가실 수 있을지 걱정도 되어 동행을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처사님이 정리를 하시기에 얼른 달려가서 정리를 도와 드렸다. 손을 파르르 떨고 계셨다. 팔순이 넘으셨으니 기력 없으신 것은 당연한데 유난히 뜨셨다. 검은 봉지에 담아 드리고 순대는 함께 넣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공양간에 얼른 뛰어 가서 하얀 봉지 하나를 얻어 와서 넣어 드렸다.

    "처사님, 순대를 놓으신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지요?' "......" "아...한글비석일뿐인데 절하시는 것도 사연이 있으신 것 같기도 하고 순대를 놓는 것은 처음 봐서 여쭤 보았습니다." "......" 한 3-4분 정적이 흘렀다. "우리 아부지는 애정때 저짝 난전에서 장날때가 대모 개기를 팔았고 우리 옴마는 아부지가 가온 내장으로 순대를 만들어가 팔았는데 나는 배가 고파가 옴마가 맹걸어 난 순대를 옴마 안볼때 마이 주뭇지"

    "아...녜,...처사님 몇 살 때 즈음으로 기억하시는대예?" "학실이는 몇 살인지 모리것고 대여섯살 안 댓껀나" "아...예"  "......." "이 근동이 물에 잠기가 옴마가 삶아 난 순대가 다 떠내리 간 기억이 안주꺼지 생생하거덩"  "그때 오데서 사싯습니꺼?" "집이라캐야 정해 진 거는 아이고 아부지가 가자 쿠모 간기라서 우떤 때는 산 중에서도 자고, 우떤 때는 옥보 고개 올라가는데 거서도 좀 지낸 거 것고, 또 우떤 때는 철구 다리 건너 가 좀 살았던 거 것기도 하고....." "아...녜" "내가 순대를 참 좋아했거덩, 그런데 거기 날마다 물 수가 엄는기라." "우리 오매가 맹건 순대가 맛있어가 수정동에 있는 기생들 술집에 갔다 존는데 내가 그 심부림을 마이 했는데 쪼매는기 순대 뭉티를 들고 가모 저거도 쪼매는맨서 내를 그리 놀맀거던, 그래서 내가 오매가 순대 갓다 주라카모 성을 엄청시리 냇어. 우떤 때는 새개이 심부림도 마이했어" "그리 시러가 내가 집을 떠난는데 우리 옴마 가심에 대못을 박았어."  " 아....녜"

    그러시면서 손을 내게 내미셨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검지와 중지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백정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혈기 왕성했던 시절에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 갈비살 골라내는 식육 전용 칼로 스스로 손가락 자르며 "옴마는 와 내로 나가 이 설움을 당하게 하요."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내 찾지 마이소. 아덜 하나 엄는 거로 치이소.이리는 몬살것심더" 그러면서 친구들 몇 명과 서울로 떠났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서울로 가출했지만 기껏 간 곳이 흘러 ~~흘러~~ 흘러~~~마지막에는 마장동이었다는...말씀을 하셨다. "그 질로 집나가는 바람에 아부지랑 오매 얼굴을  몬 밨어" "....."   "우리 옴마가 이곡사를 마이 댕기싰는데 맨날 개이 장사 함시러 저질른 죄를 빌었는데 집에 갈때가 대모 요서 기도도 했어"  "내가 죽을 때가 댄는가 꿈에 요새 옴마, 아부지가 꿈에 자주 비서 옴마 댕기던 절에 오거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제 집에 돌아 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진주의 사회운동을 다시 조사를 했다. 형평운동, 소년운동...소작쟁의운동....학생운동......그 근원을 생활 속에서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픈 가족사 이야기를 더 들었지만.....차마 글로 더 남기지 못하겠기에 여기에서 멈춘다. 이름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으셨고 혹시나 내가 어떤 말을 할까봐 처사님은 한참 뒤에 내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말하지 말아 달라고....사람들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말하면 안 된다고.....일요일 하룻밤 생각을 정리하여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2005년 7월 11일 월요일 오전 9시 56분에 안영숙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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