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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영역으로서 문화콘텐츠와 비트겐슈타인이제는 정리해야 할 때/비트겐슈타인 2016. 5. 16. 08:53
문화콘텐츠학이라는 학문이 도대체 무엇인가....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다시 원초적 고민을 시작하며......
지역에서 미술관 도슨트 활동을 하고 있으나 예술가나 예술전문가는 아니다. 예술가는 부가가치 창출에는 다소 거리를 두고 활동하며 예술 행위 자체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문제를 자신의 감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반면에 예술전문가는 예술행위를 통해 상업적 부가가치 창출과 자신의 능력과 지위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원하는 경향을 띤다. 나는 예술에 문외한이며 다만 봉사활동 개념으로 도슨트 활동을 하고 있다.
문화기획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으면서 ‘무엇을 예술로 만드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명한 화가가 그린 작품을 정교한 컬러프린트로 출력한 모사품도 때로는 정서적 안정을 준다는 점에서 미적가치가 있음을 경험한 후 단순한 표상과 예술의 차이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문화콘텐츠학에서는 어떻게 연구되어야 하는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문화콘텐츠는 예술이든 미술이든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표현해 내는 수단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나 스스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적 가치 발견이든 정신적 가치 발견이든 문화콘텐츠는 ‘그것을 가장 그것’답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상적인 것이 예술작품으로 변하는 것들, 예를 들면, 파이프, 변기, 주전자 등을 유명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용을 표출하게 된다. 문화콘텐츠는 연구 영역에서도 가장 애매한 영역이다. 문화콘텐츠가 학문으로서 어떻게 정의 내려 져야 하고 그 가치는 어떻게 규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문화콘텐츠학과 입학한 후 딱 1개월 후 세미나 발표문을 준비하면서였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식의 언어놀이 또는 언어게임을 통해 게임규칙을 대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문화가치가 지닌 윤리적 문제를 고민하다가 입문한 것이 문화콘텐츠학이어서 비트겐슈타인의 문화가치를 통해서 그것을 규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고민을 하다보니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을 통해 예술가, 예술전문가, 모방, 변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결국 문화에 대한 어줍잖은 고민을 다시 철학과 석사과정에서 전공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으로 나의 관점을 회향하는 결과를 낳았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요 예술은 근본적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다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는 『논리철학논고』에서 문화콘텐츠학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가져 보았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예술 그 자체는 정의될 필요도 없고 정식화 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예술의 영역은 비트겐슈타인식 언어놀이에서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놀이인 셈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문화콘텐츠학이라는 학문 역시 현대 산업사회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적 가치 또한 부각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콘텐츠학이라는 학문이 다른 예술영역과 과학의 영역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다만 생활세계와 유사한 친족놀이로서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콘텐츠라는 학문 역시 생활세계가 펼쳐지는 장에서 친족놀이를 가장 유용하게 할 수 있는 불확실성의 협상 매체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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