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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폐지당시 통영임진왜란/인물및지역 2016. 12. 31. 06:37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한산도에 설치된 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 통영으로 옮겨온 뒤 1895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39호
로 폐지되었다.4) 갑작스런 기구의 폐지에 따라 통제영에서 생업을
이어오던 약 8천여 명의 군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5) 통제영 해체
후 통영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시
기 통영이 고성군 소속으로 되자, 단독 郡의 설치를 요구한 유지들
의 상소문에서 당시 통영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다.
“固城郡과의 거리가 떨어져 있으나 지형이 大峙를 남북으로 예전부
터 경계를 나눕니다. 風俗이 평시에도 물과 불같아서 서로 통하지
아니하고 원수와 같아서 사이가 나빴으며..”6)라고 하여 고성과 통영
은 완전히 구분되어야 하는 곳이라고 강조하고 있다.통제영 시대에 통영은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고성군 춘원면에 소속되었으나,
실제로 통제영의 기능과 통제사의 위상에서
고성은 통제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통제영에서 소용되는 각종 재정확보를 위한 統營穀들
이 인근 군현에 지정되어 있어, 징수가 제대로 안될 때에는 해당 군
수들에게 문책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廢營과 동시에 하루 아침
에 지배적인 관계에 있던 통영 사람들이 오히려 고성군수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게 정서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
영에서 상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울에 체류하면서 중앙 정부에 시
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통영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 통제영을 대신
해 만들어진 진위대가 1899년 통영으로 이관되고, 1900년 진남군이
설치될 수 있었다.통제영
폐지 이후 제대로 관직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
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정황은 통영에서 전근대 군인들이 관료로서 새
로운 직책을 부여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개항과 통영이 지니는 경제적인 이점을 근거로 전근대 군인
들의 경제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통영에
서 수집하는 상품은 미, 대두 등 곡류와 생우였다. 이들 상품은 통
영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이웃한 고을에서 유입된 것이다. 개항
후 통영 인구가 1만명 이상이라는 점, 직업 가운데 70% 이상이 상
공업이라는 점 때문에 이들 생필품 수요가 많아 일반 잡화는 물론
이고, 곡물의 집합이 많은 곳이었다. 곡물 객주가 7, 80戶라할 정도
였고, 진주, 하동, 전라도에서 곡류 선박들의 입항이 많았다.10) 일본
인들은 수입품을 판매한 것으로 수출품을 구입해 가기 때문에 조선
인 객주를 매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객주는 중간 거래를 통해 구
전을 수입으로 하였는데, 다수의 객주가 등장하면서 경쟁이 심해 몰
락하는 객주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객주들은 자신의 자본으로 통
영에 모여드는 농산품이나 생산된 공산품을 사 모았다가 일본인 상
인의 수입품과 교환하는 자가 많았다.11) 통영 이외의 인근 각지에서
객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12) 자료에는 李聖樵가 성공한 객주
로, 金石鉉은 경쟁에서 탈락한 객주로 나오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발
견할 수 없다.13) 통제영 시대를 마감한 통영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고있었고, 이러한 경기변화를 활용한 자들의 자본축적이 가능했던 것
으로 보인다.
전근대 군인들 가운데 통제영 해체 후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인물은
많이 확인할 수 없다. <표 1>을 근거로 보면, 三千浦 權管을 지낸
金晉鉉이 진남군시대 府使를 거쳐 일제 강점기에 地主會 副會長을
담당하고 있고, 진남군 진위대 대대장이 일본인과 상업을 한다는
점,14) 주사였던 김현국이 1913년 조직되는 통영해산물주식회사의
대주주(20주 이상)로15) 참여한다는 점, 등에서 관료에서 경제가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金三柱, 金晉鉉,
金德甫처럼 지주로서 부를 축적하는 인물도 등장하였다. 이들 지주
들은 통영에서는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고성, 거제, 사천 등지에 토
지를 소유하였다. 부산의 일본인 부자 迫間房太郞이 마산에서 러시
아가 선점한 토지를 매입할 때에도 그 소유주가 통영 거주 金某씨
라고16) 할 정도로 통영 지주들이 외지에도 넓은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1915년 현재 어느 일간지의 파악에 따르면 통영 조선인
부유자는 10만원 이상 2戶, 5만원 이상 4戶, 5천원 이상 26戶, 이
가운데 개인 비용으로 太閤橋를 가설한 金三柱는 30만원의 富戶라
고 선전하고 있다.17)
이상에서 전근대 통영에서 근무하던 무인들이 통제영해체와 함께
그 직을 많이 잃었으나, 경제상황에 편승하여 지주, 상업계에서 부
를 축적한 인물도 등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統制營時代부터 軍人, 혹은 官僚의 경험을 가진 자도 있었으나, 이
무렵 새로이 등장하면서 富를 축적한 인물도 있었다.삭히는 약과 식욕을 돋우는 약을 줬다는 사실 등에서21) 統制營이
해체되기 전 일본인 행상들이 고성을 거쳐 통영을 왕래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통영은 군수 물자를 자체 조달하고, 진상물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 관장제수공업이 발달하였다. 통영의 공방은 많게는 19공방에서
13공방으로 통폐합 혹은 세분화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하였다. 장인
수 또한 4백여 명에서 2백여 명으로 축소되었다.22) 공산품 생산과
관련해서는 일본 외교기관이나 상인들의 관심이 많았다. 통제영 해
체무렵 부산영사관 보고서23)에서도 통영에서 통용되는 度量衡, 綿
布, 笠, 膳(아마, 扇의 오자로 보임) 등 공산품과 統制使衙門의 군사
數와 財政規模 등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통영의 경제사정에 대해
일본측 상인들의 관심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통제영
말기 統制營 生産品이 상품화되고 있었음을 고성부사 吳宖默의 日
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24) 오횡묵은 통영갓과 부채를 대량으로
구매해 두고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들 상품은 식민지시대 만
들어지는 統營郡誌에서 통영 주산품은 木物 등 製造 諸器, 貝付
工物, 凉臺, 笠子, 驄毛帽子이며, 이 가운데 進上品은 眞絲笠, 猪帽
笠이라는 사실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25) 대체로 통제영 시대 공방
에서 생산하던 공산품들이었다.
통영의 경제활동은 통제영 해체 이후 더욱 활발해진다. 조선에 건너
와 있던 일본 외교기관에 의한 통영의 상황보고가 증대하고 있고, 심지
어 청나라 상인들의 왕래와 동정을 살피는 보고가 이루어졌다.26)차철욱,"전근대 군사도시에서 근대 식민도시로의 변화"(317-324쪽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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