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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학문을 가르쳐야 하지 않나!
    지역문화전문과정/지역문화 2018. 3. 19. 09:31

    포스트모더니즘은 1945년 종전부터  2001년 9.11테러까지의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을 대체로 이른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등장하였으며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에 평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파괴를 위한 파괴만 남긴 이즘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19세기 초를 지배한 것은 모더니즘이었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나치게 개성 중심,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하다보니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입는지,



    왜 공동체가 중요한지를 생각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랫동안 이성과 전통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 해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 결과

    쾌감과 만족을 주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생산적인 기능을 하려면

    기존의 것을 단순히 부정하고

    해체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바람직한 대안을 마련해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특히 모든 것들이 갖고 있는 중심을 해체해 버렸고

    결국 사람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개인의 일로 치부하거나 나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해결하지 하는 방임을 불러왔다.


    이것은 결국 상대주의를 양산하게 되었고

    중심이 없어져 버렸다.

    쉽게 말하면 학교에서 교사는 있으나 선생은 없다는 말이 당연시 되고 학생이 선생을 폭행해도 개인의 일로 치부하고 학생이 선생에게 폭행을 당해도 개인의 일로 치부해도 그냥 지켜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맹점이다.

    부모를 폭행하고 살해하고, 부부싸움이 생명을 앗아간다고 해도 강너머 불구경하게 놔 두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머리는 살아 있으되 심장이 죽은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결과이다.

    그래 중심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극단적인 개인주의만 남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 소외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오히려 점점 소외된 존재가 되고 이 틈을 타서 자본과 과학기술은 고도로 발달하면서 또다른 차별을 양산하였고 잠재적 은둔형 외톨이인 히키코모리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우연하게 그렇게 되는 것들이 많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무규정성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 해결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은 당연히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사회에 실력을 행사해야 하고

    자신의 것만 중요하고

    자신의 경력 쌓기만 중요할 뿐

    다른 사람들은 자신으로 인해

    아프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다.  

    건조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하여 사회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이다. 분리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웃기지 않은가?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은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중심부 보다는 주변부에 더 집중하였고 사회에서 배척된 집단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인도 사회도 그것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했다. 공동체가 갖고 있는 유대성이 소수의 목소리를 높이게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은 차이에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니 공동체내에서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반목하게 한다. 

     

    그렇다보니 올곧게 서야 할 주체는 해체되어버리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버렸다. 스스로 온전히 설 수 없게 만든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인데 아직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강조하는 모양이다.

    다원주의가 필요하지만 유대성이 없으면 우리의 공적 자유는 보장받을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와 연결되어 있는 자율성과 지향성까지도 없애버렸기 때문에 변화를 요구할 수가 없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에게 변화를 요구하는가?

    방향성을 상실한 이기주의만 양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맹신하다보니 독자적인 능력을 상실하다 보니 스스로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의지만 하려한다. 그러면서 도움주는 사람들에겐 당위의 의무만 강조하고 자신은 권리만 강조한다. 웃기는 일이다.

    방향성 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대어 이기주의에 편승하는 인간들이 당연시되는 시대는 이미 갔다.

    그런데 그것을 모른다. 이것은 한마디로 정신적 혼란이다.

    바야흐로 혼종의 시대요,

    잡종의 시대요, 융합의 시대이다.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21세기는 공동체와 관계중심의 이즘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서양 미술계에는 얼터모더니즘(altermodernism)이 등장하였고 문화계에는 트랜스내셔널리즘(Transnationalism), 과학계에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 등장하였다.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에는 관계중심을 강조하고 공존과 공생, 공진화를 강조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것의 맹점을 수정보완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유를 공동체와 관계에서 찾기 때문이다. 시대는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학교 안에서도 이제는 개인도 존중하면서 관계의 중요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함께 가르칠 때가 되었다.

    신실용주의가 한 켠을 빼꼼하게 들어오는 사이를 채울 관계의 학문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잠시 생각하며......


    ----2018년 3월 19일 현대의 가장 큰 흐름을 문화의 다양성과 문화가 지향하는 정체성,  가치 추구, 개인의 삶에 대한 성찰에서 찾고자 하는 내가 정리하는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흐름을 바라보며-

    -안영숙이 바라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죽었다. 이미 우리는 융합을 이야기하고 설명할 수 없는 우연에 관심을 갖고 다름과 차이, 동일성과 반복, 차이와 반복을 넘어서 인간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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