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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자료- 한국사 준비 학생용(진주에는 이름난 의병이나 기릴 인물이 없었을까?)
    점이지대/진주와 순천 2005. 7. 9. 12:56





     

     

     

     

     

     

     

     

     

     

     

     

     

     

     

     

     

     

     

     

     

     

     

    김성일의 초유문을 실천한 사람들

    -김성일이 작성한 초유문 내용-

    국운이 잠시 비색하여 섬 오랑캐들이 남몰래 발동하였다. 국경을 유린하고 동서로 충돌하니 웅장한 성과 큰 진영도 일찍 울타리의 막힘이 없어서 수십일 사이에 관령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 왔다. 

    임금의 수레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온 나라가 바람결에 쓰러지듯 하니, 섬 오랑캐의 병화가 있은 후로 오늘같이 참혹한 때는 없었다.

    미친 물결이 한번 성을 무너뜨리니 막아낼 수가 없다. 성에는 창을 멘 군사가 없고, 고을에는 목숨을 바칠 백성이 없으니 적은 이르는 곳마다 무인지경을 달리는 듯하여 마침내 영남으로 하여금 적의 소굴로 빠뜨리게 하니 무너지고 흩어져서 조석을 보전할 수 없구나. 

    이것이 무슨 변인고? 그러나 이 어찌 다만 장수와 수령만의 허물이라고 하겠는가. 

    백성된 이도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사는 창을 베고 잠자며 충신은 나라를 위하여 순절할 때인데, 경상도 67주 가운데 아직도 의병을 일으켜서 팔을 휘두르며 나서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 하여 남보다 먼저 도망치거나 산에 깊이 들어가 숨지 못할 까 두려워하니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영남은 본래부터 인재가 많은 곳이라. 1천년 신라와 5백년 고려 및 2백년 조선 사이에 충신 효자의 의열이 청사에 빛나고, 절의의 훌륭함과 풍속의 순후함은 동방에 으뜸이니 이는 진실로 백성이 다 아는 바이다. 

    가까운 일로써 말하더라도 남명, 퇴계 두 선생이 한 시대에 같이 나서 도학을 창명하여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사람의 도리를 심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선비가 감화되어 점차로 물들고 본받는 이가 많았다. 평소에 많은 선현의 책을 읽고 그 자부함이 어떠하였는데, 하루 아침에 변고를 만나자 살기를 탐내고 죽음을 피할 것만을 서두를 것이냐?

    성심으로 원하는 바는 이 격문이 이르는 날 수령들은 한 고을을 효유하고 변방의 장수는 사졸을 격려하라. 

    문무 관리와 어른이나 선비들은 서로 전달하라.

    그리하여 동지를 불러 모아 충의로써 결속하고, 성을 쌓아서 스스로 지키고, 군졸을 거느리고 싸움을 거들어라. 

    부유한 백성은 군량을 운반하여 군수를 넉넉하게 할 것이요, 용감한 사람은 칼을 뽑아 들고 적의 무리를 무찔러라.

     

    혹은 말하기를 "적은 용감하고 우리는 비겁하며, 적은 병기가 예리한데 우리는 병기가 둔하니 비록 군사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집집마다 사람마다 일시에 같이 일어나 싸우면 군세가 크게 떨쳐 의기가 백배나 오를 것이다. 호미, 고무래, 짧은 창, 긴 창 등이 날카로운 무기로 될 것이니, 적이 비록 긴 창과 큰 칼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이냐?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의로운 귀신이라도 될 것이니 여러분들은 힘쓸지어다. "

     

    허국주는 1548년에 태어나 1608년에 사망한 의병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종도와 이로가 통문을 돌렸는데 합천에서는 정인홍, 고령에서는 김면, 현풍에서는 곽찬, 박성, 삼가에서는 박사제, 초계에서는 전치원, 이대기, 산청에서는 오장, 단성에는 권세춘, 함안에서는 이정이 통문 머리에 먼저 이름을 썼다. 곽재우가 이름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의병을 일으키고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진주에는 이름난 의병이나 기릴 인물이 없었을까?)

    지도와 함께 보여 줄 것...

    1.김대명  "진주의 선비 300여 명이 서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김성일은 김대명(전 군수)을 소모관으로 삼고 의병을 조직하였다. "

    김대명은 1536년 태어나 1593년 사망인 인물로 진주의 원로로 알려져 있으며 왜적을 토벌하다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57세 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 오기도 했다. 

    정인홍과는 동갑이었다. 

    2. 허국주: 1548~1608

    김성일이 허국주와 정유경을 복병장으로 삼았다. 

    진주 지수에 살았다. 허국주등은 의병을 6-700백명을 모집하였다. 

    김성일의 초유문을 허국주가 받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마인드 맵

     

    김성일은 퇴계를 하늘처럼 우러른다. 그런데 이곳은 남명을 해와 달로 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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