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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시대 진주 이야기
    2017지역문화현장조사/인문사 2017. 3. 19. 15:28

    진주성 북문안의 초가집에 시약소를 차려 놓고 커를과 박성애는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병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약 7000여명의 의료 수혜가 있었다. 커를 등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진주 지역에 주로 창궐했던 질병은 피부병, 종양, 폐결핵, 눈병 등이었다. 커를 등은 이러한 질병의 원인을 비위생적인 환경에 있다고 보고 환경 개선과 위생교육, 방역 등에 집중했다고 한다. 1906년 6월 호주 장로교 여전도회의 후원이 있은 이후 호주 교회의 지속적인 후원에 힘입어 1913년 11월 배돈병원이 설립됨으로써 경남지역 최초의 병원이 이 지역에 문을 열었다. (배돈은 페이튼 선교사 부인을 이름임) 경남의 의료 선교가 진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주에 있던 도청소재지가 부산으로 가게 된 데는 이 지역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경남지역 중에서도 신사참배 반대가 가장 심하게 제기되었던 지역이 진주지역이었다. 신사참배 강요를 심하게 받았던 일제강점기에는 신사 참배 자체를 우상숭배행위로 보았기 때문에 진주지역 기독교의 저항이 컸다. 반일, 민족의식이 깊었기 때문에 1901년까지 일본인이 아예 기거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것을 증명한다. 1880년대에 이미 5천명 이상의 일본인이 거주했던 부산에 비해 1902년에 요시무라가 진주에 최초로 왔으며 쌀가게를 운영하고자 하였으나 아무도 그의 가게를 이용하지 않아 진주를 떠났다. 일제에 너무나 비협조적인 지역이다보니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가는데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신사참배는 주로 호주선교부의 순회전도사를 중심으로 우상숭배 반대라고 하여 강하게 저항했다. 특히 메크라렌은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했는데 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유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이유였으며 11주 동안 진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진주교회는 1939년 2월 9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진주교회 성도가 천황의 신민임을 발표하고 일본정책을 순응하고 신사참배도 전향적인 인식을 할 것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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