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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서2하동의 모든 것/하동인물사 2017. 3. 22. 10:47
조지서 생각이 난다.
아니.......
그의 부인 생각이 난다.조지서의 부인은
잘 알다시피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현손이다.
남편은 연산군의 스승이었다.
그녀의 남편은세 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였다.
갑자사화때 화를 입은 영남의 학자들은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서이고
일두 정여창이라고 할 것이다.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자'
연산군은 조지서를 죽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편이 매를 맞아 죽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일설에는 조지서가 죽고 난 뒤
그의 시신을 매달아 놓은 것도 모자라
시신을 맷돌에 갈아 한강에 뿌렸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시신을 통째로 한강에 던졌다는 말도 있다.
어찌되었건간에
유홍준은
조지서의 시신이
맷돌에 갈려
그 뼈와
시신이 한강에 던져졌다고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남편의 시신을 찾이 헤맸을 것이다.치마를 한강에 던져
남편의 뼛가루와 피가
묻어있는 혼백을고이 안고
모시고 와서
만든 묘가
지금 하동 옥종에 있는그의 남편 조지서 묘이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젖먹이 아이들과
함께 남편의 신주를 등에 엎고 다니면서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살았을까 싶다.
진양지에서 확인하는조지서의
아내는
그런 여인이다.하동에서 조지서를
가장 먼저 찾은 이유는
하동 청학동을 중심으로
유학의 맥을 찾고자 하는 학자들에게
반기를 들고싶었기 때문이다.
청학이 날아드는 좋은 곳에
세상 시름 잊고
도인처럼 사는 것도 좋지만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고
저항했던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족당 조지서는
녹사 한유한과
일두 정여창과 더불어
하동유학의 뿌리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기도 하다.-남명 조식이 쓴 조지시 묘명-
원본글 출처 조지서의 묘명(墓銘) 저자 조식(曺植) 이명 자 : 백부(百符)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4 연산시 이화인(燕山時罹禍人) 오호(嗚呼)라. 이곳은 유명 조선(有明朝鮮)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조공(趙公)의 묘소(墓所)이다. 연릉 계자(延陵季子)의 묘에 별다른 남은 것이 없었으니, 성인(聖人)의 말씀이 근간이 될 것이다. 아동(兒童)이 군실(君實, 송말(宋末)의 육수부(陸秀夫))에 대해 칭송하고 주졸(走卒)이 사마 온공(司馬溫公, 송(宋)나라 명신(名臣))에 대해 칭송하였다고 국사(國史)에 정함이 있고 사람들의 입에 명(銘)이 있으니, 어찌 무슨 군더더기를 덧붙일 것이겠는가? 유독 비통하게도 저 연산군(燕山君)이 나와 더불어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었다가 임금이 망하고 자신이 죽음으로써, 당일(當日)의 소망지(蕭望之)가 된 셈이고 훗날의 오자서(伍子胥)가 된 셈이니, 소리내어 통곡(慟哭)하며 하늘을 원망할 노릇이다. 공을 세상에 알리는 비석을 여와1)(女媧)의 집에서 가져오지 않고 보통 돌을 구해 놓고서 제종(諸從)이 나의 왕모(王母, 할머니를 말함)께서 보덕(輔德, 조지서를 말함)의 자씨(姊氏)가 된다면서 나더러 곽자의(郭子儀)의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기에, 내가 사양을 하였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공의 휘(諱)는 지서(之瑞)이고 자(字)는 백부(百符)이며, 대대로 임천(林川)에서 살아왔다. 그 시조(始祖)는 조천혁(趙天赫)인데, 중국 조정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고려에 벼슬하였다. 그의 6세손(世孫)인 문하 지후(門下祗候) 조순(趙淳)이 조석견(趙石堅)을 낳았는데, 조석견은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가흥백(嘉興伯)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조익(趙益)은 벼슬이 전중(殿中)으로서 사온시 직장(司醞寺直長) 조민원(趙敏原)을 낳았다. 조민원에게 조찬(趙瓚)이라는 아들이 있어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집의(執義)에 추증되었다. 이가 곧 공의 황고(皇考, 아버지를 말함)로서, 생원(生員) 정참(鄭參)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성화(成化) 갑오년(甲午年, 1474년 성종 5년)에 생원시(生員試)에서 1등으로 뽑히고 진사시(進士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고 문과(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조수(調授)되었으며, 기해년(己亥年, 1479년 성종 10년)에 중시(重試)에서 1등으로 뽑히어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제수되었다. 이어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ㆍ응교(應敎)와 시강원(侍講院)의 필선(弼善)ㆍ보덕(輔德)을 역임하면서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는데, 연산군이 즉위하게 되자 공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을 알아채고서 창원부(昌原府)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간청하였다. 이어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서 10여 년을 지냈으나, 오히려 앙화(殃禍)를 면하지 못하여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저잣거리에서 참수(斬首)를 당하였고 그 집은 파헤쳐 연못을 만들었으며 시신(屍身)은 강물에 던져졌다.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에 개옥(改玉, 중종반정을 말함)하자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었다.
공의 계실(繼室)인 정씨(鄭氏) 부인은 생원(生員) 윤관(允寬)의 딸인데, 윤관은 곧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증손(曾孫)이다. 갑자년(甲子年)의 화란(禍亂, 갑자사화를 말함) 때에 부인도 적몰(籍沒)을 당하여 성단(城旦, 죄인으로서 성을 쌓는 일에 복역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초야(草野)를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이때 아들 조침(趙琛)은 포대기에 싸여있었고 조이(趙理)는 뱃속에 들어있었는데, 부인이 나무 열매를 손수 주워다가 옹자배기에 넣고 불때어 삶아서 조석(朝夕)으로 제전(祭奠)을 올렸으므로, 중묘조(中廟朝, 중종을 말함) 때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공의 맏아들 조정(趙珵)은 의금부(義禁府)의 감옥에서 두 번씩이나 고문(拷問)을 받은 뒤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남해(南海)로 유배를 당하였는데, 중묘(中廟)께서 그의 원통한 사정을 풀어주고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에 임명하였으나, 1년 동안 벼슬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아들 조득황(趙得璜)ㆍ조득당(趙得璫)ㆍ조득유(趙得瑜)가 있었는데, 두 아들은 일찍 죽어 후사(後嗣)가 없고, 조득유만 딸 하나를 두어 그 사위는 조원우(曺元佑)이다. 조원우는 아들 조경윤(曺景胤)ㆍ조경홍(曺景弘)ㆍ조경찬(曺景贊)을 두었다. 참봉(參奉, 장남인 조정을 말함)은 서자(庶子)인 조득련(趙得璉)만 두어 그 제사를 이었다. 조침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아들 조광수(趙光璲)ㆍ조광현(趙光玹)ㆍ조광옥(趙光玉)을 두었으며 사위는 둘인데 문인(門人) 정희봉(鄭希鳳)과 만호(萬戶) 양숙(梁淑)이다. 조이는 내금위(內禁衛)가 되었고 아들 조광후(趙光珝)를 두었으며 사위는 사인(士人) 남태형(南泰亨)이다. 남태형은 남엽(南曄)이라는 아들이 있다. 승지(承旨, 조지서를 말함)의 여러 고자(孤子)들이 모두 세상을 일찍 떠났고 오직 서자(庶子)로서 조손(趙孫)은 아직 살아 있는데, 조손의 아들은 조광해(趙光海)와 조광부(趙光富)이다.
옛날에 자산(子産, 춘추시대 정(鄭)나라 명신(名臣))이 죽었을 때 중니(仲尼)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는 옛날의 유직(遺直)이다.”고 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이어 말하기를, “보덕(輔德, 조지서를 말함)도 또한 옛날의 유직(遺直)이다.”고 하겠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진산(晉山)의 동곡(桐谷)이여, 몸이 부스러지도록 소생한 부인이여, 한 집의 쌍절(雙節)은 상강(湘江)의 반죽(斑竹)이었네. 양공(羊公)의 일석(一石)2)은 눈물 흘리며 보겠으나, 비간(比干)의 칠규3)(七竅)는 입으로 읽을 수가 없노라.각주
- 1) 여와(女媧) : 전설상의 여제(女帝)로 복희씨(伏羲氏)의 누이라고 하며, 찢어진 하늘을 5색(色)의 돌을 단련하여 기웠다고 한다. 이돌을 여와석(女媧石)이라고 하는데, 전의되어 여러 채색이 있는 돌을 가리킴.
- 2) 양공(羊公)의 일석(一石) : 양공(羊公)은 진대(晉代)의 양호(羊祜)를 말한다. 남성(南城) 태생으로 자(字)는 숙자(叔子)이며, 무제(武帝) 때 상서 좌복야(尙書左僕耶)ㆍ도독형주 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가 되어 양양(襄陽)에 주둔하였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 덕(德)을 수양하고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그가 죽자 고을 사람들이 현산(峴山)에 비석을 세웠는바, 그 비석을 바라보는 자는 모두 눈물이 흘렀으므로 그 비석을 타루비(墮淚碑)라고 불렀음.
3) 비간(比干)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숙부인데, 주왕의 음란함을 극간(極諫)하며 3일 동안을 곁에서 떠나지 않자, 주왕이 ‘성인(聖人)의 가슴에 일곱 구멍이 있다고 하더라.’ 하면서 죽여 가슴을 쪼개어 보았다는 기록.
조지서 묘명 출처: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7437&cid=49618&categoryId=4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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